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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CH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잘 모르는 채 선택합니다.
병원에서는
의사의 판단에 기대고,
자동차에 문제가 생기면
정비사의 설명을 듣고,
집을 지을 때는
설계자와 시공자의 경험을 믿습니다.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한 뒤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살아가면서 그런 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르는 것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일이
늘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더 묻고 싶고,
잘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막막해질 때가 있습니다.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하나의 질문입니다.
'내가 잘 모르는 이 일을
정말 이 사람에게 맡겨도 괜찮을까.'
시스템 개발에서도
비슷한 순간을 만납니다.
API, 서버, 데이터베이스,
네트워크, 보안, 아키텍처.
회의가 깊어질수록
낯선 단어들이 늘어납니다.
개발자는 열심히 설명하고,
의뢰자는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어느 순간
서로의 눈높이가 달라집니다.
"설명을 듣기는 했는데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 난감한 순간입니다.ㅎㅎ
다시 묻자니
이미 설명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이해한 것도 아니어서
일단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 내린 결정은
마음 한쪽에 작은 불안으로 남습니다.
혹시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전문성이란
본래 이런 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알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일을 맡길 때
우리가 정말 어려워하는 것은
기술을 모른다는 사실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어디까지 믿고 맡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모든 기술을
이해해야 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치료받기 위해
의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듯이,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개발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적어도
왜 이 방법을 선택하는지,
다른 방법과는 무엇이 다른지,
그 선택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설명은
어려운 내용을
많이 전달하는 설명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설명에 더 가깝습니다.
"이 방식이 더 좋습니다."
라는 말보다
"지금은 이 방식이 적합하지만,
앞으로 이런 부분은 고려해야 합니다."
라는 설명이
더 믿음직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좋은 점뿐 아니라
감수해야 할 부분까지 이야기해 주는 사람.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답답해하기보다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다시 설명해 주는 사람.
그런 태도에서
우리는 조금씩 안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어느 지점에서는
전문가의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는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만큼
그 지식을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는 사람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사람은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자신의 전문성을
어려운 말로 증명하려는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어렵다고 말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을 권하고,
당장의 편리함보다
앞으로의 문제까지 고민해 주는 사람.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도
나에게 필요한 판단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전문가에게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신뢰는
"전문가니까 알아서 해주세요."
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묻지 않는 것이 신뢰는 아니고,
무조건 따르는 것도
신뢰는 아닙니다.
충분히 묻고,
이유를 듣고,
그 사람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지켜보는 과정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신뢰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되어 줍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그중에는
내가 잘 아는 것을 선택하는 일도 있지만,
내가 모르는 세계를
누군가의 손에 맡겨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든 답을 알고 싶어 하지만,
사실 우리가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사람보다
내가 모르는 부분까지
함부로 다루지 않을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기술도 결국
사람의 손에서 시작되고,
사람의 판단을 거쳐
현실이 됩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그 기술을 맡기는 사람이
불안하다면
함께 가는 길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사람의 판단을 믿을 수 있다면
낯선 길도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은
단순히 기술이나 지식만이 아닙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나를 위해 올바르게 판단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함께 맡기는 일입니다.
결국 신뢰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생기는 확신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부분까지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출처 : 브런치,[by 박민정] – [설명보다 신뢰가 먼저 필요한 순간 ] [원문 링크]